일본유산 백세의 안도
의식을 계승하고 문화가 꽃핀 고장
의식을 계승하고 문화가 꽃핀 고장
2018년 5월에 와카야마현 히로가와초의 방재유산 “백세의 안도”가 일본유산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백세의 안도”라는 명칭은 안세이 원년(1854년)의 쓰나미 피해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을 구한 하마구치 고료가 “제방을 쌓아 주민 백세의 안도를 꾀할 것이다”라고 한 말에서 따 온 것입니다. 고료의 말은 이후에 문호가 고이즈미 야쿠모(小泉八雲)에 의해 “살아 있는 신(A Living God)”으로서 세계에 발표되었으며, 그 후 “볏짚의 불”이라는 이름으로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습니다. 안세이의 쓰나미가 발생한 11월 5일은 2015년 유엔에 의해 “세계 쓰나미의 날”로 지정되었습니다.
32세
국방을 위해 “히로무라 숭의단”이라 명명한 자경단을 결성
35세
수많은 목숨을 구한 “볏짚의 불” 에도시대 말기인 안세이 원년(1854년)에 도카이 지진이 일어나고, 그 다음날에는 난카이 지진에 의한 쓰나미가 히로무라(지금의 히로가와초)를 엄습해 왔습니다. 그 때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대피로를 찾기 힘들 것이라 생각한 하마구치 고료는 밭의 볏짚에 불을 붙여 사람들이 높은 곳으로 대피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39세
에도에 세키 간사이(関寛斎)를 보내 콜레라를 방역 난학의(네덜란드 의학을 배운 의사)였던 세키 간사이에게 콜레라 방역법을 배우게 하여 콜레라 유행을 최소한으로 줄였습니다.
40세
추후의 도쿄대학 의학부 재건에 공헌 에도의 종두소(추후 도쿄대학 의학부가 됨)가 화재로 소실되자 재건 비용을 기부. 의료 근대화에 공헌하였습니다.
47세
“다이큐샤”를 개설 인재 육성에도 전력을 다한 고료는 사교(私塾)를 개교. 쓰나미 피해를 복구할 때 학교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이큐샤”라 이름 지었습니다.
50세
양학교 “교리쓰 학사”를 설립 서양 문물을 연구할 필요를 느낀 하마구치 고료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하에 있던 마쓰야마 도안(松山棟庵) 등을 불러 “교리쓰 학사”를 설립. 영어 교육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52세
우편제도의 기초를 구축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명을 받아 초대 역체두(駅逓頭, 추후의 우정대신)가 되어 근대 우편제도를 창설하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60세
와카야마현 초대 현의회 의장이 되다 공직을 바라지 않았으나 주위의 간절한 바람을 받아들여 취임한 후 의회를 훌륭하게 이끌었습니다.
66세
오랜 소원이었던 서양 각국을 시찰하게 되었으나 뉴욕에서 병사합니다.
하마구치 고료(濱口 梧陵)[1820~1885]
막부 말기인 분세이 3년(1820)에 히로무라(지금의 와카야마현 히로가와초)에서 간장 양조업을 하던 곳의 분가에서 태어나 12세 때 조시(銚子)에 본가를 둔 히로야기헤 상점(廣屋儀兵衛商店, 현재의 야마사 간장)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가에이 6년(1853년)에 가업을 물려받아 7대 기헤(儀兵衛)가 됩니다. 고료(梧陵)라는 이름은 8대 기헤에게 가업을 물려준 51세 때부터 사용한 호입니다.
한편으로는 장난기 어린 면도 있었던 고료
어느 혹독하게 추운 겨울날, 고료는 마을 청년들을 식사에 초대합니다. 모두 기쁜 마음에 고료의 집으로 달려오자, 고료는 찬바람이 들이닥치는 장지문도 없는 방으로 이들을 불러 얼음이 동동 뜬 차가운 소면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소면을 먹었다는 고료. 이런 장난기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된 요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히로가와초를 관광하며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인스타그램에 해시태그 “#inamura_fire”를 붙인 후 올려서 앞으로 관광하러 올 분들께 히로가와초의 매력을 전해 주세요!
“백세의 안도” 소개 프로모션 동영상“백세의 안도” 소개 프로모션 동영상(총 00분)